류민열 문화부장

영화광들이 수없이 되뇌이곤 하는 질문. '시네마틱한 순간이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까? 글쎄 모른다. 수많은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듯, 영화에 대한 이러한 질문 역시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을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은 영화를 뒤적이던 밤들. 그리고 별안간 찾아오는 여명같은 '시네마틱한 순간'들. 그때의 환희를 맛보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영화광들은 밤을 지새울 것이다.

각자의 답들. 가령 '시적인 순간'에서 시네마틱한 순간을 찾는 사람은 장 비고의 '품행제로'(1933)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또는 '본질적인 것'이 시네마틱한 것이라 여기는 영화광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오데트'(1955)를 뽑을 수도 있겠다. 혹은 비교적 최신 영화로 돌아와서, '사운드'에서 영화적 순간을 찾는 사람은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메모리아'(2022)를 선택할 수도 있겠다.

안드레이 줄랍스키-포제션
안드레이 줄랍스키-포제션

여기 또 하나의 답이 있다. '영화가 미치는 순간들'. 답이라고 하기엔 오답에, 그저 오답이라고 하기엔 '매력적인 오답'에 가까운 영화들.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포제션'(1981),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1996),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신의 코미디'(1995). 가령 영화의 경기가 있다고 치자. 정확한 표적을 맞추기 위해 겨루는 경기에서, 누가 더 정확히 중심을 겨누었나를 계산하고 열광하는 경기에서, 갑자기 선수가 뒤로 돌아 활을 당신에게로 향한다. 경기는 뒤집히고, 오직 영화와 당신의 긴박한 관계만이 문제가 된다. 미치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포제션'(1981)은 시종일관 미쳐돌아가는 영화이다. 인물들은 왜 저렇게 행동을 하는지, 저 괴물은 또 갑자기 왜 등장하는지, 어떠한 단서도 없이 영화는 진행된다. 진행된다기 보다는 거의 매 씬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와 철썩인다. 당신이 어떤 씬을 이해하려고 달려들면 그 씬은 다시 썰물처럼 물러나고, 다음 씬이 밀물처럼 당신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이 영화의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즐거운 농락'의 바다에서 당신은 소리칠 것이다. "이 영화는 미쳤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크래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크래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1996)는 위험한 영화이다. 자동차 사고와 불륜, 도착적인 성관계 등이 거미줄처럼 뒤얽힌 이 영화는, 당신을 기어이 먹잇감으로 삼아 이 영화의 그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것을 부수는데, 끝에 가서는 기어이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윤리관조차 무너지게 할 것이다. 극중 여자가 사고로 당한 상처에 남자가 성기를 넣는 장면에서 당신은 기어이 탄식을 하고 말 것이다. 타인의 상처. 자신의 성기.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이 둘을 이 영화는 기어이 충돌-삽입시키고 만다. 당신은 이 영화와 격렬한 섹스를 마친 후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피흘리는 성기를.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신의 코미디'(1995)는 괴상한 영화이다. 극중 노인의 취미는 자신이 수집한 여인의 음모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취미이다. 온갖 바람둥이 행각을 하고 다니는 이 노인은, 후반부에 가서는 거의 부조리극처럼 느껴질 만큼의 이상한 행동들을 한다. '갑자기 그 여자의 팬티는 왜 입을까? 저 의자는 뭘까?' 하는 당신의 상식적인 질문은, 날계란으로 이루어진 괴상한 의자에 여자가 눌러앉으며 날계란이 모두 깨져가는 장면, 계란의 점액질이 여과없이 흘러내리는 장면, 갑자기 노인이 그 점액질-의자에 얼굴을 쳐박는 장면에서, 영화의 깨진 날계란들처럼 형체도 없이 흘러내릴 것이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신의 코미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신의 코미디

영화가 미치는 순간들. 그리고 이 영화가 당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들. 스크린을 기어이 찢고 나오는 칼날들. 이 영화들은 그 칼날이 되기 위해 기꺼이 비틀어진 영화들이다. 그동안 정답을 찾기 위해, 출제자가 숨겨놓은 오답을 피하기 위해, '매력적인 오답'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넘어뜨리기 위해 짜놓은 계산을 피하기 위해, 조심 조심 한걸음 초조하게 걸어왔던 당신을 위해, 성큼 성큼, 당신에게 다가와 칼날을 들이대는 이 영화들을 추천한다. 어서와서 이 영화의 칼날을 잡으라. 이 영화의 칼은 손잡이까지 칼날이다.*

*이성복의 "시라는 칼은 손잡이까지 칼날이다"에서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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